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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시간 20분 밖에 못 잤다. 여름 다 끝나고 뒤 늦게 창궐한 모기 때문에.

다행히 6시 알람에 딱 맞춰 일어났고 빵에 우유도 간단히 챙겨먹고 나왔다.

토,일,월 사흘을 쉬었지만 까대기 전날 밤은 긴장된다.

혹시 늦잠을 자서 첫 차부터 늦게 올라가 쫓기듯 리듬이 꼬이면 어쩌나,

특히 화요일은 물량이 많은 날이기에 차가 세 대가 넘어가는건 아닌가 등



7시 30분.
집하장엔 여유있게 도착했다.
아직 도착하지 않은 소장들이 대략 1/3 정도 되 보였다.
지각하면 기본 까대기 순번에서 벌칙으로 1번 씩 추가다.

첫 차 깔때 오면 1번, 두번째 차 깔 때 오면 2번, 세번째 차 깔 때 오면 3번.

가차없는 벌칙이다.


▲ 조회 직전. 우측 난로 앞에 서 계신 형님이 오늘 커피를 한 잔 타주심.

앞으로 '난로형님'이라 부르겠음.



(오늘 두번째 차 같이 하차한 형님께 벌칙 횟수 올리는 방식이 왜 이리 가혹하냐 물으니,

지각하면 바로 옆자리에 있는 소장이 지각한 소장의 물건을 레일에서 대신 받아줘야 하고,

전반적으로 모든 소장들이 고생하게 되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추측컨데, 레일 하나로

모든 물건이 연결된 시스템이기에 몇 명이 지각하면 확실히 선별작업에 부하가 걸릴 것 같다)


지난 주부터 난로가 등장했다.

한 형님이 난로위에 철제 주전자로 물을 끓여 커피를 드시고 계셨다.

가서 인사하니, '너도 커피 한 잔 할래?' 물으시기에 냅다 '아유, 주시면 너무 감사하죠'했다.

몇 달만에 마시는 믹스 커피. 평소엔 잘 안 마신다. 프림, 설탕에 살 찔까 민감해서.

근데 까대기 할 때는 당 공급+각성에 믹스 커피가 최고다. 솔직히 맛도 좋다.


▲ 첫 차 오르기 직전 믹스 커피 한잔. 손과 목구멍, 배를 뜨겁게 만든다.

차에 올라 얼른 짐 내리면서 몸에 열 내는게 아침 추위에는 차라리 더 낫다.


집하장에선 모두 믹스커피를 마신다. 공용은 없다. 

각자 자기 차에 믹스 커피를 따로 들고 다닌다. 

친한 사이끼리 쉬는 시간마다 서로 권하고 자기 것을 내서 타준다.


난로는 따뜻했다.

한 겨울이 되면 이 난로로는 어림도 없을 것 같다.

커피 타준 형님께 '여기 한 겨울엔 어지간히 춥겠어요' 물으니,

'장난 아니지, 얼어 죽지'라고 답하셨다. 벌써부터 한 겨울이 걱정이다.


첫 차는 5t짜리 용달차, 같이 오른 형님은 이번이 같이 까대기하는 건 처음이었다. 

초면에 까대기 할 때는 가급적 좋은 첫 인상을 위해 더 신경써서 상대방 배려해가며 열심히 하는 편이다.

열심히 한다는 말의 의미는, 한번 움직일 거 두번 움직이고 저 사람과 내 사이 애매한 거리에 있는 짐도 그냥 내가 내리는 것 정도다.

내가 받는 임금이 소장들 주머니에서 십시일반해 나오는 돈이기 때문이다.


CJ택배에서 조직된 노조가 요구하고 있는 쟁점도 이거다. 

본 작업 전 하차와 분류에 최소 아침 일찍부터 몇 시간이 소요되는데 이 작업을 임금에 반영을 안 하고 있다.

큰 문제다. 바꿔야 한다. 받아내야 한다. 그럼 본사가 직접 나같은 하차 전용 알바를 별도로 고용해 소장들은 분류,상차만 하겠지.


 

▲ 오늘도 100% 캔만 드시는 럭셔리한 식생활의 주인공, '냥아치'


5t 트럭은 한 30분 내외면 다 내린다.

열심히 한 보람이 있었나. 작업 중엔 한 마디도 없었던 양반이

차에서 내려오자 내게로 와서 '고생했어요, 이거 하나 마셔요'하면서 음료수를 하나 준다.

탄산은 마시면 물보다 더 갈증이 나서 그냥 안 마시고 집에 가져 왔다.

내일 보면 음료수 잘 마셨다고 인사를 해야겠다. 


두 번째, 세 번째 차는 연달아 10t.

두 번째 차는 좆같았다. 각종 농산물에 수산 생물에 가득 차서 아비규환이었다.

지방에서 서울로 고구마를 정말 무지막지하게 보낸다. 젓갈 터진 포대도 있었고, 기억도 안 나게 정신없이 꾸역꾸역 내렸다.


▲ 첫 차 내리고 쉬던 중. 좌측 의자가 내가 쉬는 자리다.

이 공간에서 스트레칭하고 의자 앉아 햇살 받으면서 몸 녹이고 광합성 하면서 쉰다.



두 번째 차에 같이 오른 형님은 한강대교 건너자마자 우측 트럼프타워부터 LG유플러스까지 있는 구역을 담당한다.

나와 같은 아웃도어 워킹화를 신고 있어서 신발 얘기를 조금 했다. 종일 딛고 걷고 서고 달리는 일이라 택배 기사들에게 작업화는 중요하다. 

(아웃도어 브랜드들이 CSR로 택배 기사들에게 워킹화 시그니쳐 모델 무료지급하면 기능성 검증과 함께 PR 효과 대박일 듯)


서글프다고 해야 하나, 아이러니라고 해야 하나

하차하다보면 별에 별 물건들을 다 마주치게 된다.

하루에도 몇 번을 최근 내가 관심있는, 가지고 싶었던 물건들이 내 손을 타고 레일 위로 올라간다.

가령 내 경우 요즘은 그렇게 다이슨 청소기가 자주 보인다. (집에 쓰고 있는 유선 일렉트로룩스 청소기가 상태가 메롱이라)

녹사평에 렉서스 매장이 있어서 그런가, 렉서스 박스에 악세사리로 추정되는 박스도 종종 눈에 띈다. (내가 렉서스를 좋아함)

각자 자기 관심있는 물건들이 더 눈에 잘 띄기 마련일거다.


▲ 한 형님이 본인 차에 아들을 태우고 와서 작업을 했다.

대여섯 살로 되보이는 아이는 차 뒤에 앉아 계속 스마트폰을 가지고 놀고 있었다.

소장들은 대형 SUV를 선호한다. 이 형은 모두가 부러워 하는 끝판왕 차를 가지고 있는 셈.

(택배 기사들의 차 얘기는 나중에 따로 하겠다)


세 번째 차는 다행히 반 정도만 차 있었다.

이태원 담당하는 형님과 같이 올라 갔는데, 이 형님이 작업 속도가 정말 빠르다.

지금까지 같이 올라본 형님 중에선 지난 주 몸짱멋남 형님과 1위를 다툴 정도의 작업 속도.

몸짱멋남 형님이 중원에서 공수전환 속도 기복없이 빠른 미드필더 느낌이라면, 이 형님은 조낸 빠른 윙어+스트라이커 스타일.

그냥 이 형님이랑 할 때는 그 속도만 따라가주면 된다. 더 빨리 하려고 경쟁 붙으면 나만 죽어난다. 


▲ 세 번째 차. 10t 반만 차있다. 브라보. 감사합니다. 복걸복이다.


중반쯤 허는데 레일을 혼자 당기다 그 대로 뒤로 자빠졌다.

레일을 몸에 안은 채로 크게 꽈당했는데, 꼬리뼈로 제대로 넘어진 모양이었다.

허리나 목이 놀라지 않은게 다행이긴 했지만, 꼬리뼈도 워낙 치명적인 부위인지라 약간 걱정이 됐다.

넘어진 이후부터는 배려 차원에서 레일도 내가 당기고 깔판 필요한 무거운 짐(쌀..)은 내가 주로 옮겼다.

다행히 큰 부상은 아닌 듯 했다. 괜찮냐고 물으니 '더 말라서 꼬리뼈에 살 없었으면 좆될뻔 했어ㅎㅎ'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헐다가 제일 아래 있던 단감 박스가 터져 있는 것을 발현했다. 

또르르 단감 몇개가 흘러 나왔고, 한창 헐다 헉헉 거리며 '아 시발.. 이걸 어쩌나..'하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데,

이태원 형님이 '야, 이거 너 집에 가져가서 먹어라'고 말했다. 아싸. 단감 좋지. 내 짝이 또 단감 좋아하지. 좋아하겠네.

'아 정말요? 감~사합니다~!'라고 답하고 얼른 차 모서리에 챙겨놨다 가지고 내려왔다.


세 번째 차 스캐닝은 쓰레빠형이 찍었다.

근데 반 정도 내렸는데 갑자기 사라졌다. 

그 이후부터 스캐너를 다른 형님이 들고 찍고 있었다.

나중에 알고보니 배탈이 나서 화장실에 간거였다. 

지난주에도 한 형님이 스캔 찍다 전날 과음을 했다고 불안하다 불안하다 하더니,

야 나 죽겠다 소리치곤 화장실로 달려간 적이 있다. 스캐닝이니 망정이지 까대기 본진에서는 트럭 터널에 올라서면 빠져나가기 힘들다.

나도 혹시나 한창 내리고 있는데 배가 아플까 불안해서 아침에 일어나면 냉수 한 잔 마시고 무조건 화장실에 앉아는 보는 편이다. 


▲ 화장실. 정말 냄새나고 그렇다. 남자들만 쓰는데다 누가 관리하기도 애매하고 하니.

나는 아직 큰 일은 본 적이 없고, 앞으로도 보고 싶지 않다. 소변도 밖에서 본다.

형님들이 볼 일 보면서 다들 담배를 워낙 많이들 펴서 담배 냄새가 싫어서.


지난 주 토요일엔 늦잠 자서 못 나갔다.

아직 고딩들이 나오는 걸로 알고 있었는지라 크게 걱정않고 제꼈다.

그런데 오늘 와보니 한 형님이, 걔넨 겨울방학 시작해서 '취업계'로 나오기 전까지는 안 나오기로 했다고 했다.

12월 중순까지 이 L사 동용산 택배 집하장 하차 용병은 온전히 나 하나다.


▲ 오늘 겥한 감과 음료수를 그대로 집에 가져왔다. 내거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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