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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각했다. 


7시 40분에 집하장에서 10t 트럭 후진을 돕고 있어야 하는데(오라이~ 오라이~ 스톱~ 문 열게요~) 7시 30분에 일어났다. 


싼디(오전 택배 알바 알선해준 내 친구)에게 바로 조금 늦는다고 전화하고 세수도 안 하고 옷 대충 걸치고 미친듯이 쐈다. 


무릎 인대 보호대 하는 것도 깜박했다. 오토바이 타고서야 아차 싶었다. 별 수 없었다. 오늘은 좀 조심하자 생각했다. 


이제 아침 오토바이 주행은 춥다. 급한 맘에 손 시려운지도 몰랐다.  




다행히 8시 전인, 7시 57분에 도착했다. 


막 첫 10t 트럭 문 따고 헐고 있었다. 스트레칭도 못 하고 달려가면서 장갑끼고 어깨 한번 돌리고 차에 올랐다.


싼디(내 친구)가 내가 늦은 바람에 대신 까대기 팀에 합류해 스캔을 찍고 있었다.


*까대기 팀은 3인 1조, 2명은 차에 올라 양쪽에서 하차를 하고 1명은 스캐너로 택배 물품에 바코드를 하나하나 인식한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한 마디 하고 바로 차에 올랐다.


"늦지 마 썅년아, 얼른 올라가~" 친구는 한 마디하고 자기 탑차가 세워진 자리로 돌아갔다.


까대기 알바(나), 까대기 순번 소장(택배기사), 스캐너 순번자(택배기사) 제대로 된 구성으로 돌아왔다.



오늘 첫 차를 같이 깐 형님은 유난히 늘 옷 매무새나 행색이 멀끔하다.


작업복인데도 불구하고 옷 깔맞춤도 신경쓰는 게 보이고 신발도 크록스 초콜릿, 여하간 눈에 띄는 분.


휴식 중 사무실 컨테이너 박스에서도 웨이트 트레이닝용 단백질 보충제도 챙겨 드셔서 인상적이기도 했다.



왠걸. 하차 작업 속도가 무지 빨랐다.


뒤에서 스캔 찍던 다른 형님이 너무 빠르다고 좀 천천히 내리라 했을 정도.


1/3 정도 까고는 웃통 벗고 내리셨는데 나이(대략 40초중 추정) 감안했을때 거의 완벽한 상체 근육 발란스. 


하복부에도 지방 하나 없었다. 난 아직 준비가 안 된 관계로 초반 입고 있던 긴팔만 벗고 반팔입고 했다.  


첫 차였기 망정이지, 이 형님이랑 두 번째 차 순번으로 올라와 같이 내렸으면 기진맥진 했을거다. 


한 반쯤 까다, "형님은 늘 옷을 너무 깔끔하고 예쁘게 잘 입어서 택배기사 안 같아요"라고 하니,


기분 좋은 듯, "그렇지? 형이 좀 부티나게 생기긴 했지? 하하하" 라고 호탕하게 웃었다.


이 형님과는 앞으로 이래저래 친해질 수 있을 것 같다. 


이 형님은 앞으로 멋짱(멋쟁이+몸짱)형님으로 부르겠다.



▲ 오늘 깐 두번째 10t 트럭. 잔짐이 많지 않아 크게 무리는 없었다.

같이 올라간 형님은 이번이 처음이었는데 짐을 함부로 쓰러뜨리지 않는 등 상당히 꼼꼼했다.

잔짐이 그리 많지 않아 크게 힘들진 않았다. 쌀과 고구마가 좀 있었지만 과한 양은 아니었다.



= 작업량과 노동강도에 관하여


첫 차를 다 까고 차에서 내리려는데, 

멋짱형님이 스캔 잡고 있던 형님에게 물었다.


"야 이 차에서 몇개나 나왔냐?"

"천팔백개요"

"야, 뭐 씨발 왜 이렇게 갈수록 잔바리(잔짐)이 많아. 옛날엔 아무리 많아도 천삼사백개였는데.."


예전 같으면 집앞 오프라인 매장에서 샀을 작은 물건도,

더 저렴하게 판매하는 온라인 판매처가 증가하면서 갈수록 소형 택배물이 더 많아지고 있는게 아닐까 싶었다.

 

잔짐이 많으면 하차시 더 많은 에너지가 소비된다.

잔 짐은 레일 위에 바로 올릴 수가 없어서, 얇은 플라스틱 판(깔판)을 깔고 그 위에 올린 채로 레일에 올린다.

자연스레 쭈그려 앉아야 하고, 물건들이 작다 보니 레일에 올려 놓고 밀어도 깔판이 잘 안 밀리거나 이탈하는 경우도 잦다.


하차하는 입장에서는, 적당한 크기(라면박스보다 조금 큰)에 

적당한 무게(최대 20kg 정도?)로, 테트리스 고수같이 예쁘게 쌓아 놓은(상차 한) 차가 제일 작업하기 좋다. 




첫 차 까고 내려와 한 숨 돌리고 쉬고 있는데, 쓰레빠 형님과 마주쳐 인사를 했다.


"냥아치들 보러 가야지~?"라고 하길레, '얼레, 뭔 소리지' 했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고양이들 보러 가잔 얘기였다.



▲ 지점장 전용 사무실에서 고양이 새끼들이 있는 연결된 창고로 들어서는 쓰레빠 형.

뒤로 '냥아치'가 따르고 있다. 



몇달 전 경사가 있어 기사들끼리 분식을 대량 주문해 돌리고 먹고 있는데, 삐쩍 마른 고양이 한 마리가 왔단다.


너무 마르고 딱해 보여서 몇 기사들이 음식을 주기 시작했는데, 이 녀석이 눌러 앉아버린 것. 


암컷이었고 얼마 안 가서는 새끼를 가지기 까지.. 기사들은 지점장이 쓰는 사무실 컨테이너 박스에 연결된


창고 컨테이너 박스까지 내주고, 매일 통조림 놔주며 지극정성으로 돌봤고 1달 전쯤 새끼 4마리를 순산.


고양이들 유독 예뻐하며 정성껏 돌보는 기사 몇 명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제일은 쓰레빠 형.



▲ 지점장이 쓰는 사무실. CCTV로 모든 기사들이 하차, 상차, 분류하는 모습을 상시 모니터링하고 있음.

아마 과실에 의한 분실, 고의에 의한 절도를 적발하기 위한 본사 차원의 정책인 것 같음.



쓰레빠형 따라 가보니 벌써 어미 고양이(다들 '냥아치'라고 부름)가 나와 있었고,


창고에는 이제 막 걷고 활동하기 시작한 1달 된 새끼 고양이들이 꼬물꼬물 거리며 놀고 있었다.



▲ 어미 '냥아치'와 새끼들을 보여주는 쓰레빠형의 뒷모습.

삼색 태비와 B&W 턱시도는 이미 데려가 키우겠다는 기사 모집 완료.

삼색 태비는 쓰레빠형이 데려가 키우기로. 쓰레빠형은 고양이들을 너무 예뻐함.

'형님이 고양이 아범이네요'라고 하니 멋쩍게 웃음. 앞으로 고양이 얘기로 친해질 듯.



문제는 작업장 컨테이너에서 새끼 포함 5마리를 언제까지 이렇게 거두긴 무리라는 것.


어미는 그대로 두더라도 새끼들은 기사들 대상으로 입양 희망자를 모집중이라고 했다.


그리고 4마리 새끼 중 누가 봐도 가장 예쁜 삼색태비, 흰&검 턱시도는 기사들 중 2명이 곧 데려가기로 예약 완료.


아직 갈 곳을 못 찾은 2마리 중에 한 마리가 눈에 들어왔다. 전체가 검은 색인데 꼬리가 짧다. 


나도 이미 성묘 한 마리와 같이 살고 있는데, 최근 새끼 고양이 한 마리를 더 키워볼까 고민하고 있던 차, 입양할까 고민이 됐다.


그래도 1달 자묘는 이유식 챙겨줘야 하고 손이 너무 가서 아직은 부담스러웠다.


냥아치들의 입양 관련 모든 실무는 쓰레빠형님이 담당하고 계신 것 같아, 일단 고민해보겠다고 말했다.


어미 젖 뗄 3달 무렵까지 갈 곳이 정해지지 않으면.. 정말 숙고해보고 내가 데려올까도 싶다. 



▲ 쓰레빠형의 뒷모습.

지난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매일 집하장에서는 맨발에 쓰레빠를 신고 있음.

'형 발 안시려요?' 물어도 괜찮다고 함. 심지어 저렇게 맨발에 쓰레빠 신고 까대기 하러 

올라오기에 놀라서, '형 그러다 발 다치면 어쩌려고요'해도 그냥 무심하게 '됐어~'함.

혹시나 저러다 발등이라도 찍히면 산업재해 판정을 받을 수 있는건가 의문이 들었음.

배송담당지역은 용산구 후암동, '갈월동과 접한 후암동이라 배송하기 좆같다'고 말함.

담배를 무척 많이 피고, 스캔 순번으로 스캐닝을 하면서도 피고 본인 차에 상차할 때도 핌.

욕도 많이 하는데 주로 친한 소장들에게는 '쌍년아~'라는 표현을 즐겨 씀. 그래도 선한 인상.

냥아치 남편(고양이 새끼들의 아비)이 종종 찾아와 어미를 공격한다는데 본인이 막는다고. 

싼디에 의하면 게임을 '오타쿠' 수준으로 좋아한다고. 2주차만에 가장 친해진 형님.

아침이면 먼저 다가와서 아는 척 해주고 말도 걸어주고 해서 고마움. 

(쓰레빠+맨발은 아침 작업장까지만, 배송할 때는 양말 제대로 신고 운동화 신는단다)



오늘은 2.5대 깠고 무릎 인대 보호대 안 했으나 다행히 무릎 포함 어떤 곳도 부상 없었다.



▲ 본인 탑차에 오늘 배송할 물건을 모두 실은 후 사무실에서 송장을 정리하고 있는 싼디.

모든 기사들이 이 작업을 한다. 배송 물건의 부피나 특성, 배송 지역, 건물 별 특성에 따라 

오늘 하루 어떤 동선으로 배송을 할지 묶는 작업을 한다. 폰으로는 택배 수신자와 통화 또는

문자를 주고 받으며 몇시쯤 받을지, 반품 물건이 오늘 배송 예정이라는 등의 사실을 공지해준다. 

이 작업만 봐도 택배 배송 노동은 간단한 노동이 아니다. 매일 변화하는 작업량과 물품 특성,

구역 내 배송지 비중을 감안해 유기적으로 최적의 동선을 짜야 하고 고객과의 커뮤니케이션도

필수적인 복합노동이다. 실제 택배기사끼리는 진상 수신자들 때문에 힘들다고 자주 하소연 한다.



싼디가 자기 배 고프다고 별 일 없으면 같이 밥 먹자고 해서 작업장 인근에서 같이 밥을 먹었다.


어제 술을 좀 마셔서 머리가 너무 아프단다. 콩나물국밥을 먹었다. 얻어 먹었다.




▲ 행주대교 인근의 콩나물국밥집. 별 5개에 4.5개. 추천. 상호는 까먹음.



주 화제는 앞으로 내 알바 이야기.


운 좋게 화~금/주4회/11월까지 조건부에서 화~토/주5회/무기한 할 수 있을 때까지로 변경됐으나


가장 큰 문제는 곧 겨울을 맞아 교통수단. 당장은 싼디가 빌려 준 바이크(아프릴리아 300cc 빅스쿠터)가 있고,


아직 날씨가 그렇게 춥지 않으니 문제가 아니지만 곧 겨울이 되면 어떻게 할지가 고민이다.


오가기 정말 추울 곳인데다 빙판이라도 생기면 정말 위험할 구간(수색로-행신, 작업장 진입로까지 비포장 도로 등)이기 때문이다. 


맘 같아선 이번 기회에 겸사겸사 소형차를 한 대 구입할까도 싶지만, 솔직히 그럴 여유는 없다. 


지금으로서 최선의 방법은 엄마의 경차(스파크)를 12~2월 까지만이라도 빌리는 것. 


추석 전후로 엄마와 냉전 중(추석에 안 감)이라 어떻게 풀어야 할지 고민이다.


싼디는 '얻을 게 있으니, 맘에 안 들어도 자존심 버리고 좀 져주라'고 한다.


오토바이 타고 집에 오면서 계속 고민해봤는데, 친구 말이 맞는 말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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